로저 폰 외흐(Roger Von Oech)는 창의성 전문가입니다. 유명한 회사들이 이 사람의 수업을 듣고 실무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IDEO 같은 회사도 로저의 팬이지요.
제가 이 사람의 창의성 카드(Creative Whackpack, Innovative Whackpack)를 여기 저기 선전하고 다녀서인지 주변에 이 카드를 갖고 있는 사람이 꽤 늘었습니다. (조만간 창의성과 카드, 주역, 사상, 보편적 패턴 등을 꿰뚫는 글을 하나 올리겠습니다)
로저가 얼마전에 또 기발한 상품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책이 아닙니다. 카드도 아닙니다. 공(?)입니다. Ball of Whacks라고 합니다. Whack은 로저가 애용하는 단어인데, 머리를 확 갈기는 의미로 씁니다. "깬다" 이거죠. Ball of Whacks는 "whole ball of wax"라는 숙어를 연상케 하는데, 이 숙어는 "모든 것(everything)"을 의미합니다. 이 공의 부제는 "A Creativity Tool for Innovators, Artists, Engineers, Writers, Designers, and You"입니다. 궁금하시죠?

조금 특이해 보이는 공이지요? 가까이에서 볼까요?

재질은 플라스틱입니다. 크기와 모양이 같은 조각 30여개로 이루어져 있고 속에 자석이 들어있어서 조각끼리 서로 붙습니다.

이런 모양들이 가능합니다. 기본 조각은 사진 좌하단에 보이는 것인데, 오면체 사각뿔입니다. 황금비율을 적용해서 꽤나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로저가 정말 천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조각을 이용하면 아까의 공을 아래와 같이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이거 가지고 놀다보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매우 다양한 형태를 만들 수 있습니다. 혼자서 놀면서 키득키득 거리고 아하!를 외치게 됩니다.
자 이것이 왜 창의성과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는 분을 위해 설명을 좀 더하겠습니다.
이 공을 사면 조그만 책이 하나 따라옵니다. 공의 사용법이죠. 이 공의 역사, 수학 등을 포함해서 이 공으로 창의성 워크샵을 하는 수십가지 방법까지 들어있습니다.
로저가 이 책에서 멋진 말을 하나 했습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요, 놀이는 발명의 아버지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언제 얻습니까 라는 질문에 "문제에 직면했을 때", "충족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빈둥 거리며 놀다가", "뭔가 다른 일을 할 때" 등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전자가 필요에 의한 발상이면 후자는 놀이에 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겠죠.
MIT 미디어 랩의 마이클 쉬라쥐(Michael Shrage)는 진지한 놀이(Serious Play)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어떤 창의력 전문가가 "놀라운 아이디어가 생각나는 상황"을 조사했습니다. 탑4를 뽑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 운전
- 운동, 걷기(구글에선 직원들에게 산책을 권하죠)
- 샤워 중, 탕 속에서, 수영장
- 잠에 빠져들거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문제를 골똘히 생각할 때는 탑4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로저의 책자에 나오는 한가지 재미있는 실험을 인용하겠습니다.
두 그룹의 비슷한 사람들에 대해 정신의 예민함(mental acuity)을 테스트하기로 했습니다. 테스트 직전에 한 그룹은 20분 동안 방 안에 조용히 앉아있도록 한 반면, 다른 그룹은 그 시간 동안 다른 방에서 날카로운 칼로 사과 껍질을 깎았다고 합니다. 결과는? 사과 껍질을 깎았던 그룹이 훨씬 더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손을 썼다는 것입니다. 뇌에서 손과 관련된 부위가 매우 넓다는 것은 잘 아실겁니다. 눈으로 보면서 손을 조율하는 작업을 하면 뇌에서 다양한 뉴런이 촉발된다고 합니다. 또 가만히 있는 것보다 육체적 운동을 하면 뇌로 가는 혈류랑이 증가하면서 뇌 활동에 더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시각, 촉각, 후각, 청각 등 공감각을 써서 뇌가 깨어났다는 점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기똥찬 생각을 해냈던 상황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낼 생각은 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문제가 잘 안풀리면 책상 앞을 떠나서 산책을 하거나 샤워를 하는 "적극적인 창조적 상황 만들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를 풀다가 잘 안풀리면 나가서 전기톱질을 한다는 켄트도 이 사실을 잘 활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전기톱질 같이 몸으로 하는 행동을 하면 이제까지 안쓰던 머리 속 회로가 작동하게 되면서 이제까지 놓치고 있던 부분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깁니다.
저는 기천이라는 무술을 10년 넘게 해오고 있습니다. 몇 년 전 학습 클리닉에서 뇌파실험을 했습니다. 저의 뇌파로 컴퓨터와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을 하는 것인데, 머리 속에서 알파파(차분하고 집중한 상태에 나오는 뇌파로 이 상태에서 공부를 하면 최고의 효율을 보임)가 나오면 자기 캐릭터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일반인에 비해 무척 빨리 컴퓨터를 이겼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알파파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기천을 하는 생각만 해도 머리 속에서 알파파가 나옵니다. 그말은, 아무리 시끄러운 버스 속이라도 기천을 하는 상상만 해도 알파파 상태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람마다 자신을 창조력의 준비 상태로 만들어 주는 주문이 다릅니다. 그걸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무척 요긴합니다.
다시 공으로 돌아와서, 제가 이 공을 갖고 놀다보면 안쓰던 뇌의 근육이 자극받는 느낌이 팍팍 듭니다. 뭐랄까 왼손으로 양치질을 시도할 때의 느낌이라고 할까요.
여러분들은 자신의 뇌를 창조의 준비 상태로 만들어 주는, 창조성의 스위치를 켜주는 어떤 습관을 갖고 계신가요? 여러분들의 조직은 그런 것들을 격려하나요, 방해하나요?
--김창준
p.s. 이 주제에 관심있는 분들은 안무가 트와일라 타프의 "천재들의 창조적 습관"을 일독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창조성이 습관화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환경과 연결된 준비의식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를 그런 환경 속에 놓음으로써 그들은 창조적인 하루를 시작한다.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역시 매일 아침, 스튜디오에 들어가 똑같은 일을 했다. 피아노 앞에 앉아 바흐의 푸가를 연주한 것이다.
...베토벤 역시 그러했다. 그는 비록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매일 같은 의식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 산책을 하면서 어김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상을 작은 노트에 끄적인 것이다. 그렇게 산책하는 동안 마음을 풀어주며 황홀경으로 이동한 후, 방으로 돌아가 작업을 시작했다.
천재들의 창조적 습관, p.29~p.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