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의 제품에 대해 흔히들 하는 비유로 비타민과 진통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타민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걸 말합니다. 반면 진통제는 없으면 너무 고통스럽고, 있고 없고 차이가 큰 걸 말합니다. 아무래도 자원이 부족하고 불확실성이 높은 스타트업 경우에는 진통제 아이템이 더 좋은 선택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마케팅에 상대적으로 노력을 덜 들여도 된다는 것이지요. 어차피 당사자들이 그걸 갈구하고 있을테니까요.

그 외에도 진통제의 장점이 더 있는데, 많이들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진통제는 피드백 받기 좋다는 점입니다. 사용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도움이 된다 안된다 기준이 좀 더 깐깐하고 또 더 진솔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주는 경우가 많은 것도 있고요. 얼마전에 썼던 무엇을 프로그래밍 할 것인가에서 말하는 실제 가치를 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Y Combinator"라는 미국의 유명 엑셀러레이터의 창립자 폴 그레이엄(Paul Graham) 역시 진통제의 중요성, 실존적 문제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통제보다 비타민을 먼저 만들려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진통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타민을 만들고 있는 사람도 흔하고요. 어쩌면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편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정말 숨겨진 통증을 찾고 거기에 맞는 진통제를 찾는 능력을 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 훈련을 통해 그 근육을 키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스타트업이나 기획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프로그래머를 예로 들면, 기획자로부터 요구사항을 전달 받는 경우에도 뒤에 숨겨진 어떤 통증이 있을지 잘 이해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에 따라 적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말해지지 않는 것이 말해지는 것보다 많기 때문이며, 결국 프로그래머도 누군가 사람을 만족시켜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따로 포스트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통증을 찾는 관찰훈련을 어떻게 하느냐는 이야기로 넘어가 봅시다. 아래 두 장의 사진을 보시죠.




첫번째는 어떤 스토리가 보이시나요? 지하철 환풍기 앞에 칸막이가 충분히 벌어지지 않았나 봅니다. 종이컵을 받쳐서 틈을 벌려놓았습니다.

두번째는 좀 더 복잡한 개선입니다. 뭔지 아시겠나요? 서울에서 판교가는 택시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통행료를 내는 고속도로를 지날 때 기사가 돈을 내고 신용카드단말기 좌측의 환풍구에 쇠로된 집게를 집어놓았습니다. 차가 도착해서 제 신용카드를 받을 때 기사는 그 집게를 보고 통행료를 추가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냅니다. 특히 집게로 단말기 입구가 가로막혀 집게를 제거하지 않으면 카드 긁기가 불편하다는 점은 그런 기억을 더 쉽게 하게 도와줍니다.

IDEO는 창의적 조직으로 잘 알려져있는 유명 디자인 컨설팅 회사입니다(관련하여 혁신적 쇼핑 카트 참고). 그런 IDEO에서 소위 창의성 담당 최고 책임자(Cheif Creative Officer) 역할을 하는 제인 풀톤 수리(Jane Fulton Suri)가 2005년도에 출간한 중요한 책이 있습니다.

"Thoughtless Acts? : Observations on Intuitive Design"이라는 책입니다. 사실은 사진집에 가깝습니다.



디자인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자신들의 환경에서 불편함을 느껴 자족적으로 고치고 변용한 것들을 사진으로 찍은 기록물입니다. 예컨대 사람들이 종이에 뭐를 써야 하는데 받쳐쓸 곳이 없어서 서로 자기 등을 내어주는 모습 같은 것 말이죠. 제가 보여드린 2장의 사진이 그런 예입니다.

제가 이 책을 보고 감흥을 받아, 2005년 경에 모 IT 기업에서 워크숍을 할 때 사람들(개발자, 기획자, 디자이너 등 소프트웨어 제작자 모두)을 대형서점으로 보내어 이런 장면들을 발굴하고 사진찍어 오도록 시킨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문화인류학적 접근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즐거워했고 많은 통찰을 얻었습니다.

될 수 있으면 다양한 상황을 관찰하는 것을 권하긴 하지만, SW적으로 한정해서, 일반인들이 자신에게 불편한 SW를 어떻게든 변용해서(사용방법이나 다른 인지적 도구를 사용하든가 해서) 쓰는 사례를 찾는 것도 좋습니다.

좀 더 노력을 기울일 요량이 있다면 통증 노트를 만드는 것을 권합니다. 통증 노트는 매일매일 내가 직접 겪거나 혹은 남이 겪는 불편함과 통증을 관찰해 기록하는 노트입니다. 일반적인 아이디어 노트와 차이점은 그냥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적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통증(및 그걸 허접하게라도 개선한 예)을 기록한다는 점이지요.

사실 이런 것들을 찾는 게 그리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당장 현재 자신이 앉은 자리에서 주변을 둘러보세요. 아마 서너 가지 이상은 찾으실 수 있을 정도로 머리 속 모드만 살짝 바꾸면 도처에 널려있는 게 보일 겁니다.

이렇게 뭔가 통증을 느껴 개선한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에 몇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우선 그냥 통증만 찾는 것보다 쉽습니다. 일반적으로 통증은 무엇인가의 부재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없는 것"을 찾는 것이고 그래서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개선은 무엇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 눈에 잘 뜨입니다. 그리고 개선 방식을 보면 어떤 통증이 있었는지가 더 직설적으로 드러납니다. 당사자가 문제 상황 속에서 직접 이렇게 저렇게 실험을 해보다가 안착한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여러 시행착오 경험이 녹아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신제품을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이런 임시방편의 개선을 한 사람들을 찾아 보는 걸 권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야 말로 그 문제상황에 대한 전문가일 것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렇게 삶 속에서 뭔가 소소하게 개선한 모습을 찾는 것을 중요한 "디자인" 연습이자 관찰 연습으로 생각합니다(제가 말하는 위기지학의 연장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분야에 있건 전문가가 되길 원한되면 이런 관찰 훈련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김창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