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럴드 와인버그의 PSL 워크샵에 참석하려고 2007년에, 당시 같이 워크샵을 진행하는 에스더 더비(Esther Derby)에게 문의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안내 메일은 받았지만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참석 못할 핑계들을 만들어서 "다음 해에 가야지"하고 넘겨버렸죠. 2008년에도 "내년에", 2009년에도 "내년에" 노래를 불렀습니다. 근데, "내년에" 노래를 부를 때에는 항상 피치 못할 사정(돈, 가족, 스케쥴 등)이 있더군요. 일종의 자기 정당화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가 작년 말 와인버그의 시한선고 소식을 듣고는(인생은 짧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하라 참고) 더이상 늦출 수 없다는 생각에 용단을 내렸습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심지어 와인버그가 돌아가셔도 PSL이나 AYE(와인버그가 만든 컨퍼런스)가 열리기만 한다면 무조건 가자. 그리고 올해가 되었고, PSL이 먼저 열리더군요. 그래서 PSL에 가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내가 PSL에 가게 된 것은 나의 외부적 상황이 좋아졌냐보다 내 굳은 결심이 차이를 만든 것 같습니다.

와인버그랑 같이 근처 식당으로 식사하러 가는 길에 저의 부끄러운 과거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버지니아 사티어(Virginia Satir) 이야기를 해주시더군요.

참고로 사티어는 가족 치료계에 있어 선구자적 역할을 한 분 중 하나입니다. 심리학자들과 심리치료사들 대상으로 "가장 위대한 심리치료사"를 묻는 설문에 대한 논문을 본 적이 있는데, 사티어가 열 손가락 안에 꼽히더군요. 저는 사티어에 대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와인버그의 책을 보면서 다시금 눈을 뜨게 되었죠. 그래서 사티어에 대한 교육을 몇 달 간 받기도 했고, 사티어가 심리 치료를 하는 비디오도 여럿 구해서 봤습니다.

비디오를 보면서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사람들을 변화시키는지 너무도 놀라웠습니다. 생모에게 신체적 학대를 당한 어린 남자아이 둘이 폭력적 행동(옆 집의 개를 죽이려고 하는 등)을 보이는 문제로 사티어를 찾아온 가족을 치료하는 비디오(Of Rocks and Flowers라는 비디오테이프)였는데, 스튜디오에서 사티어가 부모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 악동들은 가만히 있질 못합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정신이 없죠. 그런데 사티어가 관심을 갖고 대화를 해주자 순한 양처럼 순식간에 차분해지는 것이 기적 같았습니다.

와인버그는 제가 비디오를 보고 감명 받은 이야기를 듣고는, "오, 직접 만나면 더 환상적이지요"라고 말해줬습니다. 사티어는 여러 워크샵을 진행했는데, 1988년에 사티어가 돌아가시자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나는 사티어 워크샵에 참석하려고 몇 년 간 별렸는데..." 이 말이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결국 못만났다는 것 뿐이죠.

와인버그가 이어 말했습니다.

저는 괜찮아 보이는 교육적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첫 번 째에 참석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살았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제가 이번 PSL에 참가한 것이 참 뿌듯하게 느껴졌고, 또 앞으로도 이런 교육적 기회를 자주 찾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와인버그는 사티어의 사상을 소프트웨어 개발과 관리에 접목했습니다. 그의 QSM 4권 시리즈의 구성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1. Systems Thinking(시스템적 사고) = 사티어의 시스템적 가족 치료 접근법
  2. First-Order Measurement(일차적 측정) = 사티어 인터랙션 모델 (참고PDF)
  3. Congruent Action(일치적 행동) = 사티어의 일치성 개념
  4. Anticipating Change(변화를 기대하기) = 사티어 변화 모델
첫 번 째 책을 예로 들어보죠. 사티어 시절에는 심리 치료시 될 수 있으면 개인별로 문제해결을 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딸이 우울증으로 문제를 겪는데, 엄마가 따라오려고 하면, "당신 때문에 이 사람이 영향을 받아서 제대로 된 치료가 불가능하다, 오지마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티어가 그렇게 6개월간 딸을 잘 치료하고 있는 와중에 그 딸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당신이 우리 딸을 이상하게 바꾸고 있다. 내 딸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당신을 고소하겠다." 그래서 사티어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머니랑 딸을 같이 불러 놓고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제대로 치료되었다고 믿었던 딸이 예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차 가족 구성원을 하나씩 추가하는 과정 중에 획기적인 접근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명 시스템적인(systemic) 가족 공동 치료법입니다. 이게 1951년도였습니다.

한 사람만 치료해서 가정으로 돌려보내면 그 사람만으로 보면 문제가 치료된 것 같지만 가족이라는 시스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사티어는 되도록 가족 전원을 불러놓고 심리치료를 했습니다. 가장의 심리적 문제가 있고, 그 문제는 그 집의 두 살 짜리 애기랑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아도 사티어는 전원을 다 모아놓고 치료를 했습니다.

와인버그는 소프트웨어 개발의 문제도 이렇게 접근해야 진정한 해결이 가능한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이버네틱스의 시스템적 사고와 사티어의 시스템적 가족 치료 접근법을 소프트웨어 개발과 관리에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의 한 두 부분만 신경쓰는 것이 아니고 전체를 보자는 것이죠.

2, 3, 4권도 보면 모두 사티어의 핵심적 아이디어들에 근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혁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혁신은 많은 경우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두 개 이상의 분야를 서로 연결짓는 데에서 나옵니다. 와인버그는 이런 작업을 훌륭히 해냈습니다.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도 이방인으로 보고, 사티어 공동체 쪽에서도 이방인으로 보는 외로움을 이겨내고 말이죠.

와인버그에게 물었습니다. 사티어와는 어떤 관계로 보아야 하는가. 학생이자, 선생이고, 또 동료였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도반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와인버그는 참 행운이었구나, 또 사티어는 참 행운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동시에 나에게 있어 다른 분야의 도반들이 참 소중하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고요.

--김창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