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이런 이메일을 받습니다. 앞으로 커리어 패스에 대해 걱정이 된다. 돈도 벌면서 동시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느낀다. 어떻게 현재의 김창준이 될 수 있었나 궁금하다. 조언을 해달라.

뭐, 저 역시 사는 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걱정도 하고요. 다만 먼저 경험해 봤고, 따라서 좀 더 고민해 봤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라는 이유로 덜 익은 조언을 조심스럽게 해드리고는 합니다.

그런 조언들은 이미 애자일 이야기에 몇 편 올라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충해서 오늘은 제가 어떻게 공부해 왔는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학자도 아니고 해서 어떻게 공부하는가 남에게 조언한다는 것이 상당히 조심스럽기는 합니다만, 업무도 하면서 보조적으로 공부를 하는 한명의 지식 노동자로서 제 경험담이 도움이 되었다고 느낀 분들이 몇 분 계셔서 용기를 내어 여기에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언이라고 보지 마시고, 이 사람은 이렇게 사는구나 하고 편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앞에 언급한 두 개의 글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아직 읽지 않은 분들은 그 두 글을 함께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우선 피터 드러커 이야기로 시작을 합시다. 네, 제가 피터 드러커 영향을 좀 받았습니다. 대학생 때 그의 프로페셔널의 조건을 읽고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피터 드러커의 저작 중 몇 안되는, 개인 특히 지식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언 모음집입니다.

(이미지 출처는 aladdin.co.kr)

 
특히 3부 "프로페셔널로서의 자기 관리"에서 6장 "인생을 바꾼 7가지 지적 경험"이 좋았습니다. 원문은 Inc.com의 My Life as a Knowledge Worker라는 기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큰 영향과 교훈을 줬던 7가지 경험 중 세번째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Gradually, I developed a system. I still adhere to it. Every three or four years I pick a new subject. It may be Japanese art; it may be economics. Three years of study are by no means enough to master a subject, but they are enough to understand it. So for more than 60 years I have kept on studying one subject at a time. That not only has given me a substantial fund of knowledge. It has also forced me to be open to new disciplines and new approaches and new methods -- for every one of the subjects I have studied makes different assumptions and employs a different methodology.
 
--Peter Drucker (1997), My Life as a Knowledge Worker, Inc.com


드러커는 매 3-4년 마다 새로운 주제를 하나 골라서 공부를 해왔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단순히 새로운 지식을 얻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접근법과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3년이 긴 기간은 아니라서 하나의 주제를 통달하기에는 충분치 못하지만 그 주제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하다고 합니다(해당 주제를 전공하는 학부 졸업생 수준을 목표로 했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나네요).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60년이 넘는 기간(20대부터 80대까지 -- 아마도 그 이후로도 죽을 때까지) 동안 이 원칙을 지켜왔다는 점입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60년이면 20개의 주제인 셈입니다. 하나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그가 공부했던 일본 예술과 회화(繪畵) 같은 경우는 책을 공저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답니다.


저는 이런 것이 피터 드러커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만큼 자기관리가 잘 안되어서 따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3년 동안 한 가지 주제만 파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통상 위인들이나 되어야 여러 분야에 능통하지 범인들은 한 두 분야만 하기에도 벅차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오히려 위인들이 한 두 분야를 오래 팔 수 있습니다. 범인들은 여러 분야를 만져야만 살아남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장애와 위기가 있을 때 여러 분야를 건드리는 사람은 하나가 막히면 언제나 다른 경로와 우회로를 찾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비교적 큰 괴로움을 겪지 않습니다만, 반대로 한 두 분야만 들이 파는 사람은 막히면 어떻게든 거기에서 해결을 봐야 하기 때문에 외롭고 괴로운 기간이 더 길 겁니다. 그걸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위인이다 이거죠. 이게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저는 동시에 "치열하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한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도 해요. 이거 깔짝 저거 깔짝 잡다하게 맛만 봐서는 어떤 큰 성취를 이루기가 힘들어요. 매번 섭씨 80-90도까지만 물을 덥히다 보니 에너지는 나름 소비하지만 물은 한 번도 끓지 않는 거랑 비슷해요. 또다른 문제는 되돌아 봤을 때의 문제인데, 너무 난잡하게 건드리면서 살면 되돌아 봤을 때 스스로 혼란스럽기 쉽거든요. 내가 뭐하면서 살은 거지? 내가 잘하는 게 뭐지? 모종의 통합성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저는, 여러 분야를 하되, 몇 몇 분야에는 촛점을 맞추고 지긋이 인내하는 내공을 쌓는 훈련을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학습 모형은 이 생각을 토대로 해서 만들었어요. 처음부터 이런 고민을 해서 만든 것은 아니고, 드러커가 말하듯이 점진적으로 어떤 체계가 (사후적으로) 생기게 된 것 같아요.


저는 학습에 중층적 주기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10년 이상 공부하는 것, 5년 공부하는 것, 3년 공부하는 것, 2년 공부하는 것, 1년 공부하는 것, 6개월 공부하는 것, 3개월 공부하는 것, 한 달 공부하는 것, 2주 공부하는 것, 1주일 공부하는 것, 하루 공부하는 것, 1시간 공부하는 것 등이 있어요. 각기 다른 레벨에서 다른 주기로 돌아가죠(얼핏 듣기에 애자일이랑 비슷하지 않나요?). 보통 장기 주제가 두어 가지 있고, 중기 주제가 네 다섯 가지, 단기 주제가 예닐곱 개 정도 동시에 돌아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물론 잠깐 손을 좀 놓았다가 나중에 다시 같은 레벨에서 혹은 다른 레벨에서 보게 되는 경우도 많아요). 
 
다시 말해, 몇 몇 가지에 대해서는 긴 안목과 "뜸"을 들이면서 공부를 하고요, 더 많은 것들은 빨리 회전을 시켜요. 그래서 순간적인 기회 포착을 통한 공부는 이런 타이트한 싸이클을 쓰죠.

이 모형을 쓰면 별 죄의식 없이 공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나는 내 전공이나 공부해야 하는데, 지금 이거 들고 있으면 안되는데 하는 죄의식). 그리고 빨리 돌아가는 싸이클들이 신기하게도 크게 돌아가는 싸이클과 맞물려 돌아가는 "상승적 이득"도 볼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저는 어떻게 하면 생산적이면서 인간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화두를 갖고 있고, 이건 거의 10년 넘게 고민하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도 중요한 화두였죠. 하지만 그 동안 기억을 되살려 보면, 그 기간 동안 여러가지 더 작은 공부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동안은 교육학 이론에 심취해서 1-2년을 고민한 적이 있고요. 또 한동안은 OOP 설계에 큰 관심을 갖고 2년 정도 고민한 적이 있죠. 테스팅이나 UX에 대해서 수 년 간 고민한 적도 있고요. 그보다 짧게 공부한 적도 많습니다. 정보 시각화 경우는 반년 정도 정말 심도 깊게 연구했었고요. "대중의 지혜"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반 년 넘게 연구를 했죠. 이렇게 과거 시제를 쓰는 주제들은 지금 손을 완전히 놨다기보다는 관심의 초점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유보상태 정도로 볼 수 있어요. 개중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꾸준히 물을 주고 관심을 주는 주제도 꽤 있고요. 이에 비해 훨씬 더 짧은 주기의 공부도 있는데요, 예컨대 요즘에는 가계도라는 주제를 흥미롭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1주일 됐습니다.

(가계도의 감정적 관계 범례, 출처는 위키백과)


이렇게 공부를 하게 되면 저에게는 여러모로 좋은 것 같습니다. 일단 부담이 덜 되고 크게 의지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뭔가 큰 그림을 갖고 먼 걸음을 갈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큰 질문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우선은 석 달 짜리, 반년 짜리 정도로부터 시작해 보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컨대 석 달 간은 X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계속 갈구하고 찾는 겁니다. 뭐를 보든지 간에 X에 대한 해답이 있을까, 무슨 연관이 있을까 고민하면서 봅니다. 다양한 채널들을 구합니다. 책도 하나만 보지 말고, X에 대한 책 서 너 권을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6개월 이상 지속되는 주제에 대해서는 책과 논문을 쌓아놓고 보는 것 같습니다. 한 주제에 대해 적어도 서가 한 줄을 다 채웁니다. 논문은 해당 저자의 논문을 거의 다 구해서 읽고, 그 사람의 제자나 그 사람의 스승, 동료의 논문들을 찾아 읽습니다. 아직 생존해 있다면 이메일 등으로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합니다. 예를 들어 "대중의 지혜"라는 주제는 수학적, 심리학적, 경영학적, 사회학적, 기술적 접근 경로를 통해 다양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1년 이상 되는 주제는 책장을 한 두 개 차지하게 되더군요.


이런식으로 하나에만 빠져서 공부를 하면 간혹 지치기도 하고 환기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1달이나 1주일 주기의 짤막한 공부도 곁들이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가계도가 그런데 이제 막 강연을 듣고 책을 1권 구해서 읽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짧게 우연치 않게 공부하게 되는 것들이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보면 결국 더 크게 돌아가고 있는 주기의 주제와 맞물려있습니다. 가계도란 주제에 대해 제가 얼마나 더 깊이 들어가서 공부하게 될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이미 관심있어 하는 10년 넘는 주기의 주제와 연결점이 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은 한 동안 손을 놓고 있었던 중기 주제랑 연결이 되어서 오래된 관심을 잠에서 깨울 수도 있고요. 그러면 이 공부가 적어도 몇 달은 족히 이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재미에 이런 중층적 학습을 계속 하는가 봅니다.

p.s. 이 글은 저와 달리 의지력이 강한 분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안될 것 같습니다.

--김창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