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관심사 때문에 괴로워 하는 친구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철학도 재미있고, 역사도 좋고, 언어도 좋고 이런 거죠. 우리는 이런 경우에 "팔방미인이 제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다"(Jack of all trades, and master of none)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이런 문제로 심각한 장래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요.

제 후배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까 합니다. 그 친구가 중국에 여행을 가서 연변에 들렸는데 거기서 인생의 전환점 같은 걸 만납니다. 윤동주 박물관에 들렸다가 지나가던 길에 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작은 중국 아이 하나가 놀고 있는 걸 봅니다. 아이를 좋아하는 친구인지라 반갑게 말을 걸었습니다. "니하오?" 그 아이의 답변은 유창한 "안녕하세요"였습니다. 갑자기 의문 하나가 머리 속을 관통합니다. "이 아이가 한국 애인가, 중국 애인가" 거기서 핵폭탄급 충격을 받습니다.

국가라는 개념은 인류사에 있어서 매우 근래에 생긴 것입니다. 삼국시대 땅 위에 여기 선 넘으면 고구려 땅, 여기 안 쪽은 신라 땅 이런 개념이 있었을까요? 구글 맵처럼 실제 땅 위에 선이 있을까요? 또 그 땅위에 사는 사람들은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다 하는 개념이 있었을까요? 중요하기나 했을까요?

그 친구는 직장인이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학원에 들어가서 국제 지역학(아시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는 원래 관심사가 늘 다양하고 어떤 종류의 지적 자극이든 재미있으면 공부하는 그런 사람인데 한 분야 전공을 택했다는 것 자체가 뉴스였지요. 그런데 저랑 가끔씩 만나면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 해주더군요. 자기는 현재 전공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여러가지에 관심이 간다. 어째야 하겠냐? 자기 생각에는 수십년 현재 전공을 들이파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분야에 눈을 돌리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러자니 재미없고 고생스러울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이것 저것 건드리다간 죽도 밥도 안될 것 같고... 공부는 뼈를 깎아가면서 고생하면서, 괴로움을 이겨내면서 해야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이런 조언을 해줬습니다.

우선 다음 그림을 봅시다.




원이지요? 정말일까요? 조금 각도를 바꾸어 옆으로 뉘여보면...




타원이 됩니다.

우리가 철학, 물리학, 생물학, 수학, 사회학, 정치학, 역사학, 예술 등등 개별적인 학문분야(discipline)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고,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소위 간 학문(inter-disciplinary), 혹은 다 학문(multi-disciplinary)적 연구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걸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 다음과 같은 그림을 생각할 겁니다.




녹색의 원들이 소위 인정 받은 "원래부터 존재해 오던" 학문들이고 주황색의 가지는 그런 학문들에서 조금씩 연결해서 붙여놓은 간학문이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앞서의 원이 보는 각도에 따라 타원이 되듯이, 관찰자의 공간을 뒤틀면...


이렇게 주객이 바뀌어 보이기도 합니다. 즉, 기존의 녹색 원들이, 주인공이 되는 주황색 원의 이곳 저곳에서 약간씩 빼내어 취한 "간학문"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것 저것 잡다하게 공부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실은 한 덩어리를 공부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법입니다 -- 관점에 따라서 말이죠.

사회가 이미 구획해 놓은 학문 구분은 매우 임의적이며 우연적인 걸지도 모릅니다. 땅바닥에 여기부터는 봉천11동 이런 식으로 나와있지는 않은데, 우리는 머리속에서 이미 선을 그어 놓고 말합니다. "좌표계는 영어로 Cartesian Coordinates라고 하네... Cartesian이 뭐지?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던 철학자 아냐? 얼라리요? 철학자가 수학책에 나오네. 에이, 하던 수학 공부나 하자"

제가 오래전에 노스모크 "교과목간의절연"이라는 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교과목간의절연을 보면서 저희 후배들이 만든 컴퓨터공학과 사이트를 떠올립니다. 그곳에는 컴퓨터공학의 주제나 수업별로 웹게시판들이 별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예컨대, C언어 게시판이 있고, 자료 구조 수업 게시판이 있고, 네트워크나 게임 게시판이 또 따로 있습니다. 사용률이 낮은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 그곳에서는 어떤 부정적 어포던스를 제공합니다. 자료 구조 수업 게시판에서는 다른 수업 이야기가 나오질 않습니다. 또, 네트워크 게시판에서는 사람들이 3D 그래픽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소위 관리자가 적당한 원칙에 의해 게시물을 이동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환경에서는 잡종적지식의 발생이나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꺼내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픽과 네트워크, 자료구조를 엮어주는 이야기를 할 어포던스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어디 마땅한 자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명시적으로 분류화된 게시판 제목들과 "서로 다른 영역" 게시물 간 링크걸기의 불편함 등은 사용자들의 인식 구조를 제한할 수 있을 겁니다. A와 B의 연결점을 찾기 보다, A에선 B를 말하지 않고, B에선 A를 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이제까지 제가 경험했던 교과체계와 수업환경에서는, 학생이 수학 시간에 윤리적이거나 역사적인 지식을 개입시키거나, 혹은 철학 시간에 물리적 지식을 끌여들이는 것을 격려하지 못했거나 혹은 문제시 했습니다. 제가 아둔해서였겠지만, 수학의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만든 사람과 철학에서 말하는 피타고라스가 동일인(단순히 생물학적 동일인의 의미가 아니고 하나의 일관된 인격과 사상을 가진 동일인)이고, 또 수학과 철학은 피타고라스를 통해 서로 엮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학교를 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학교에서, 교과과정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과목간의 연관점을 더 강조하거나, 학생들이 연관점을 찾을 마음이 마구마구 생길 그런 환경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게 무서운 겁니다. 기존의 범주구분에 맞지 않는 사고를 하면, 그것은 사회에서 쉽게 공격당하거나 불편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다보면 편하게도 아예 사회적 범주틀에 고스란히 들어맞는 생각만 나게 됩니다. 범주는 우리에게 사고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고의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이거 찔끔, 저거 찔금, 요기 찌르고 저어기 찌르고 하면 다 된다는 말은 아니라는 조언도 덧붙였습니다. 여기에 어떤 단서가 붙습니다. 그것은 내부적 화해와 충돌입니다.

역시 노스모크의 초기 페이지인(스위키 시절로 기억합니다) "잡종적지식"에서 제 글을 일부 인용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잡다한지식"을 잡종적지식과 동일선상에 놓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단순한 정보 쪼가리의 집합은, "수집에 든 노력"을 치하할 망정 그 지식의 폭이나 다양함에 감탄할 만한 것은 아니다. 사전의 모든 단어를 눈감고 A부터 Z까지 단박에 줄줄 읊을 수 있는 사람 -- XX 기억법 등에서 이런 기술을 가르친다 -- 을 보고, "대단하다, 욕 봤다"는 말은 해줄 수 있겠지만, 그 단어들을 꿰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제대로된 영어 문장 하나 생성해 내지 못한다면 어떻겠는가. 물론, 잡종적지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중간 과정으로서 "잡다한지식"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별개의 지식들을 하나의 큰 시스템 속에서, 동일 의미론 속에서, 자신의 몸 중심으로 엮어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알고 철학자 피타고라스를 알면서, 이 양자를 어떤 일관된 의미맥락 속에서 나름대로 엮어 내지 못하면 "백과사전적 지식"이라는 천박한 찬사만 얻을 뿐이다.


내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중요한 아이디어들이 A1부터 A10까지 있었다고 칩시다. 이 때 외부에서 전혀 이질적인 A11이라는 아이디어를 접했습니다. 그러면 A11을 내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 중에 A1과 충돌을 시켜봅니다. 또 A2와 충돌을 시켜봅니다. 각각의 충돌이 여러 화두를 던지고 때로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충돌을 시키면서 내부에서 화해를 만들어 냅니다. 다양성 속의 조화(Unity In Diversity)입니다.

어떤 이물질이라도 들어오면 몸의 면역 체계가 가동되는 것이 순리입니다만, 오히려 그 이물질을 인체 곳곳으로 보내면서 아예 친화시켜버리고 그 외부물질을 아예 나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저는 기존에 알고 있던 전산학 이론과, 제가 근래에 익힌 교육학 지식, 심리학 지식, 동양철학적 지식들의 화해와 조화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을 꾸준히 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하나의 덩어리로 다져가며 계속 눈덩이 굴리기를 해나가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모순을 만들고 그걸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긴 했지만 저에게도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후배의 고민은 꾸준히 스스로 풀어나가야 하겠죠.

--김창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