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연히 지인의 블로그에서 바이오 라이팅이란 걸 보게 되었습니다. 그 블로그 주인장이 "환상소설을 쓰는 법"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거기에선 모 작가가 자동으로 소설을 써주는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실제로 전산학 논문을 자동으로 생성해주는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 있고, 그 프로그램으로 생성된 논문을 모 학회에 제출했다가 통과가 되어서 "그 학회에 참가하여 허상을 까발릴테니 돈 좀 보테주오"하는 광고를 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첫 위기지학 프로그램

바이오 라이팅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제가 처음으로 만든 위기지학 프로그램이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만든 위기지학 프로그램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던 적도 있고 하니 이 차에 몇 자 적어볼까 합니다. 바이오 라이팅에 비견할 바가 못되는 시시한 프로그램이니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 :)

처음 만든 프로그램(아마도 초등학교 2-3학년 쯤?)은 당연히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설사 게임을 만들어도 저 자신은 별로 즐길 생각을 안했죠. 얼마간 지난 후에 저 자신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기억이 안납니다. 대충 Story Maker라고 합시다. (터보 C로 만들었는지, 터보 파스칼로 만들었는지 가물가물한데, 터보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문제상황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겁니다. 처음 발단은 이렇습니다.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을 하니 재미있기는 한데 내가 할 수 있는 자유도가 너무 적고 내 취향에 꼭 맞는 스토리의 게임이 없으며, 상대적으로 이야기의 소비자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불만이 있었고, 영어 단어들을 외워야 하는데 저는 재미없이 공부하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스스로의 영어 공부와 재미를 위해서 일종의 교육용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화면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검은 용 한마리

화면배치는 컴컴한 화면 맨 아래에 줄이 하나 그어져 있습니다. 그 줄 밑(제일 아랫 줄)에는 영어 단어가 찍혀 있습니다. 그리고 줄 위 공간은 자유롭게 글을 쓰는 공간입니다. 좌상단에 커서가 껌뻑이고 있죠.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영어로) 소설을 써야합니다. 여기에 단서가 붙습니다. 컴퓨터에 어떤 어휘(및 숙어, 인상적인 글귀 등) 집합을 미리 저장해 놓고, 그 단어(혹은 문구)가 임의로 화면 밑단에 출현하면 소설을 쓰다가 그 단어를 사용해서 글을 계속해야 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타자 연습 게임과 상당히 유사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화면 밑단의 단어를 내가 똑같이 입력하면 자동으로 다음 단어가 출현합니다. 마치 테트리스에서 다음 조각이 미리 보이는 것과 비슷하죠. 그러면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해지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새로 출현한 단어를 사용해야만 합니다. 이게 계속 반복되는 겁니다. 언제까지? 소설이 다 됐다고 생각될 때까지 혹은 충분히 즐겼다고 생각할 때까지.

글을 쓰다보면 다음 단어나 표현이 하나의 문제 상황을 일으킵니다. 공주를 어떻게 구해낼까? 지금 이 망망대해를 떠도는 외로운 우주선에서 어떻게 타임머신을 구하지? 등등. 지금 이 스토리에서 어떻게 저 단어를 소화시킬 것인가, 어떻게 점과 점을 연결할 것인가. 혼자서 하는(혹은 어떻게 보면 컴퓨터랑 주고 받는) 상상 놀이입니다.


세상을 주유하기, 혹은 뒤섞기

어휘집단은 주제별로 나뉘어 집니다. 당시 저는 SF 어휘군, 판타지 어휘군, 추리소설 어휘군 등으로 몇 개를 등록해 놓고는, 그 중 하나를 선택해서 해당 분야의 소설을 쓰는 게임을 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설사 같은 단어 집단이 선택될지라도 나오는 순서 등에 따라 그 이야기는 천차만별이 될 수 있었던 점입니다(심지어는 거의 같은 순서로 단어가 나왔더라도 그날의 컨디션과 배경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또 게임에 익숙해지다 보면 두가지 이상의 어휘군을 선택해서 게임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컨대, SF 어휘군과 판타지 어휘군을 같이 선택하면, 용(dragon)이나 우주선(space shuttle), 혹은 "신분증을 스캔하겠습니다"(Let me scan your ID card, please), 음유시인의 하프(the bard's harp) 같은 표현이 한 소설 속에 나오기도 합니다. 혹은 자신이 다른 곳에서 읽은 글의 주요 단어, 표현으로 어휘집단을 만들 수도 있는데, 예컨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고 자신이 학습하고 싶은 단어와 표현 몇개를 추려서 입력을 해놓고 게임을 하면, 전혀 새로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쓰여집니다.

당시 나름대로의 영어공부 철학을 갖고 있었던 저는 이런 게임이 있다면 교육적이기도 하고 재미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 게임을 만들어서 해보니, 아니! 너무 재미있는 겁니다. 창작의 즐거움을 그냥 온 몸으로 폭포수 맞듯이 했습니다. 덕분에 영어공부도 꽤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단어나 숙어, 문구 등을 쉽게 외울 수 있었거든요(특정 맥락 하에서 직접 사용해 봤으니까요).


소박한 깨달음

그런데 이 게임의 "고득점"(이 게임에는 점수 개념이 없었습니다만)을 얻으려면 이상하게 재미가 없어집니다. 나오는 단어 족족이 그냥 입력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별안간 이 게임은 별볼일 없는 타자 게임(시간 제한도 없고 점수도 없는)이 됩니다. 혹은 자신과 타협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단어는 끼워넣기가 어려우니까 그냥 넘어가자 생각하면 일단 타이핑해 넣은 다음(바로 다음 단어가 뜨겠죠), 백스페이스로 입력한 단어를 지웁니다. 그러면 그 단어를 건너뛰게 되죠. 하지만 이걸 자주하면(혹은 원하는 다음 단어가 나올 때까지 계속 돌리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게임을 만들고 해보면서 나름 깨달은 것은 똑같은 기능을 제공하는 소프트웨어더라도 사용자 스스로가 어떤 목적을 갖고 어떤 규칙을 지키면서 쓰느냐에 따라 소프트웨어의 가치와 용도가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시스템을 사용자와 프로그램의 협력관계로 생각하면 간단한 프로그램으로도 많은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고, 이후 제가 만드는 프로그램들에 이 깨달음을 적용하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김창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