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일을 "채널"을 통해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라. 결정을 신속히 하기 위한 지름길을 절대 허용하지 마라.
- "연설"을 하라. 가급적 자주 그리고 길게 말하라. 자신의 요점을 긴 일화와 긴 개인적 경험담으로 예시하라. 가끔 주저치 말고 "애국자적"인(즉, 조직 친화적인) 커멘트를 해라.
- 가능한 경우에는 모든 사항을 "좀 더 연구와 고민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위원회로 넘겨라. 위원회를 최대한 크게(절대 다섯 명 이하가 되게 하지 말라) 만들도록 노력하라.
- 최대한 자주 부적절한 이슈를 끄집어 내라.
- 의사소통, 회의록, 결의내용 등의 정확한 표현을 갖고 옥신각신 하라.
- 지난 회의 때 결정된 사안을 재언급하고 해당 결정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다시 끄집어 내도록 노력하라.
- "신중"(caution)할 것을 주장하라. "합리적"(reasonable)이면서 동료 회의참가자들 역시 "합리적"이 되도록 촉구하고, 서두르는 걸 피해서 차후 당황하게 되거나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
- 어떤 결정이든지 그 결정이 규범적으로 적절한지 걱정하라. 계획 중인 행동이 우리 집단의 업무 영역을 벗어나는 건 아닌지, 또 더 높은 조직의 정책과 충돌하지는 않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라.
- 요청사항이 문서화 될 것을 요구하라.
- 요청된 것을 완수해 전달하는 시점을 늦추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라. 요청된 것의 일부분이 이미 준비가 되어 있더라도 요청전체가 완료되기 전까지는 전달하지 말라.
- 획득하기 어려운 고품질의 원재료를 요청하라. 만약 얻지 못하면 이에 대해 논쟁을 하라. 원재료 품질이 떨어지면 당신의 작업 품질도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하라.
- 지시를 내리거나 지급을 하는 것 등과 관련한 절차를 부풀려라. 승인시 한 명이면 될 걸 세 명이 승인해야만 하도록 만들어라.
- 모든 규정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적용하라.
- 작업을 형편없이 하고 그 탓을 나쁜 도구, 기계, 장비 등으로 돌려라. 이런 것들 때문에 당신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불평하라.
- 자신의 기술과 경험을 신입이나 자신보다 기술이 부족한 사람에게 전해주지 마라.
세 보셨나요? 보시는 중 혹시 항목들 간의 공통점 같은 거 발견하셨나요? 아마 비공식적으로 이런 행동을 자주 보이는 조직이 많을 것이고, 공식적으로 이런 행동을 격려하고 요구하는 조직도 꽤 있을 겁니다.
자 이제 이 리스트의 출처를 밝히겠습니다.

OSS 휘장 (출처는 위키백과)
1944년 1월,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첩보 기관인 OSS(CIA의 전신)는 유럽 내 적국에서 활동하는 공작원들이 적국의 경제에 기여하는 조직과 회사들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떨어뜨리고 속도를 늦추는 "와해 공작"(sabotage, 사보타지)을 잘 하도록 야전교본[1]을 배포합니다. 이 와해공작 야전교본은 이후 기밀 취급 대상에서 제외되고 공개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본 리스트는 이 야전교본에서 제가 일부를 편집없이 그대로 발췌, 번역한 것입니다. (이런 행동들이 실제로 조직을 와해시키냐 아니냐가 논점이라기보다 OSS라는 조직에서 40년대에 실제로 적국 회사 와해를 위해 사용한 지침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봐 주시길 바랍니다)
놀라운 점은 공작원이 회사와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한 전략을 무의식적으로(와해시킬 의도 없이, 때로는 조직을 이롭게 하려는 선의에서) 자기에게 사용하고 있는 조직이 꽤 된다는 점이죠. 핵심은 그런 행동을 하는 자신들은 정작 잘 인지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쯤해서 이 글의 제목으로 돌아가 봅시다.

"스크루테이프 편지"의 표지 (출처는 위키백과)
이 글 제목은, 영화화 됐던 나니아 연대기의 원작자 C. S. 루이스가 쓴 특이한 형태의 소설 제목(The Screwtape Letters)입니다. 선배 악마이자 삼촌인 스크루테이프(Screwtape)가 조카이자 신참 악마인 웜우드(Wormwood)에게 서른 번이 넘는 편지를 통해 악마라는 직업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내용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웜우드가 파멸시키고자 하는 한 영국인 남성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해봐라 조언을 해줍니다(말장난들이 재미있는 게 많습니다 -- 예컨대 스크루테이프의 조직은 lowerarchy입니다).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악마가 할만한 행동은 사실 초보 악마들이나 저지르는 실수이고 전문가는 좀 더 세련되고 은근하며 상식과 반대되기도 하는(예컨대, 어 그거 좋은 행동 아냐? 할 법 한) 방법을 쓴다고 스크루테이프가 자상하게 지도해주는 부분입니다.
위에 나온 OSS의 와해 공작 가이드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일견 보기에는 조직에 이로운 행동 같습니다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또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조직을 와해시키는 행동은 사실 너무 드러나거나(그래서 쉽게 저항에 부딪히거나)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장 치명적인 행동은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고 남들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고단수의 와해성 공작(위 리스트에 나온)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세간에서는 지능형 안티, 자폭, 열사 등으로 통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와해 공작을 매일 행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만약 팀장이거나 조직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면 좀 더 신중하게 자기를 돌아보고 위 리스트를 좀 더 심각하게 검토해 봐야 할 것입니다. 조직에 이득이 될거라 생각해 행하는 행동들 중에 혹시 공작원이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쓰는 전략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조직에 문제가 있어서 그걸 해결하고 싶어하는 리더들 중에 그 문제의 유지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혹시 당신도 그런 지능형 안티는 아닙니까? 쉽게 말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 계십니까? (관련하여 변화에 실패하는 팀장의 특징 일독을 권합니다)
혹시 좀 더 탐험을 해보고 싶으시다면, 친구들 몇 명과 모여서 각자 자신이 공작원이고 그 조직을 와해시키려고 한다면(그렇다면 의도가 대놓고 드러나지 말아야겠죠) 혹은 조직 와해를 위해 웜우드에게 조언을 준다면 어떤 행동을 하거나 권할지를 적은 다음 서로 목록을 바꾸어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 보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김창준
[1] OSS, 1944, Simple Sabotage Field Manual (Washington, DC: Office of Strategic Servi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