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전쟁
지난 달에 SBS에서 <인재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했습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를 12월 14일에 방영을 했습니다. 1부의 제목은 "신화가 된 인재"입니다.제가 이 이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모 블로그에서 이 방송을 보고 흥미로운 부분을 정리한 글(SBS 스페셜 "인재전쟁")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일대학교에서 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블로그 저자의 표현 -- 사실은 예일대학교가 아님)가 구미를 자극하더군요. 간단히 말하면,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보다, 돈과 상관없이 자기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부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썼던 "나는 앞으로 뭐 해먹고 사나"하고 닿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저는 SBS 사이트의 다시보기를 통해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저희 집은 TV 시청을 하지 않거든요). 대부분 익히 아는 내용이고 식상한 면(솔직히 구글 칭찬 같은 부분은 이제 좀 지겹습니다)도 많았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봤습니다.
예일대학교 학교 졸업자 연구 이야기는 위 다시보기에서 대략 25분 이후부터 나옵니다. 실제로 방송을 보면 "예일대"라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그냥 아이비리그 대학 졸업생이라고 하지요. (일단 여기에서부터 정보가 와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정보 왜곡에 대해서는 잠시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대학 졸업생 1500명을 20년간 추적 조사했다고 합니다. 졸업할 때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겠다고 한 사람이 17%, 일단 돈을 벌고 나중에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한 사람이 83%였는데, 20년 후에 백만 장자가 된 사람은 전체 중 101명이었고, 그 중 단 한 명만이 "돈 벌려고 했던" 집단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결국 돈을 좇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좇으라는 말입니다.
놀랍죠?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좋아보이는 면이 있습니다(영어에서는 too good to be true라고 하죠). 저는 이렇게 강한 인상을 주는 연구가 있으면 항상 출처 확인을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노스모크 시절 이런 것을 ShowMeTheSource라고 했죠).
소스를 찾아서
어떻게 그 연구의 출처를 찾아야 할까요. 일단 성우의 나레이션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소리나는대로 옮겼습니다)."1960년부터 20년동안 스롤리의 블로토닉 연구소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1500명의 졸업생을 대상으로 직업선택의 동기에 따른 부의 축적여부를 조사했다."
몇가지 키워드가 될만한 단어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1960, 1980, 20년, 스롤리, 블로토닉 연구소, 아이비리그, 1500, 부의 축적. 본능적으로 영문 검색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글에서 키워드를 변화시켜 가며 검색을 했습니다. 이런 검색에서 가장 강력한 키워드는 일상적 언어사용에서 빈도가 높지 않은 고유명사입니다. 스롤리나 블로토닉이 그것들이죠. 하지만 성우의 발음에서 영어 이름을 유추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에 구글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잘못된 스펠링이 있으면 "네가 생각한 것은 원래 이것 아니었냐?"하고 넌지시 제안을 해주기도 하거든요.
여차 여차해서 찾은 이름은 Srully Blotnick입니다. 미국식으로 발음하자면 "스럴리 블로트닉" 정도 되겠네요.
네이버 등에서 (스럴리/스롤리) (블로트닉/블로토닉)으로 검색하면 대부분 영문 이름 표기가 없고, 많은 경우 출처 미상으로 인용에 인용을 거듭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국내 출판된 책(최소 9권 이상 -- 블로트닉/블로토닉)도 마찬가지고요. 외국에서 나온 책은 어떨까해서 검색해 보면 구글 책검색도 결과가 비슷합니다. 대부분 출처가 모호한 인용이죠. 예를 들면 Mylinia라는 회사의 웹사이트 경우는 이 연구를 인용하고는 있으나 책 이름이 잘못되었습니다.
고생하면서 소스를 계속 거슬러 올라가보면 Getting Rich Your Own Way나 The Corporate Steeplechase라는 책들이 나옵니다. 첫번째 책의 내용은 일부를 한 블로그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방송에서 나온 수치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수치는 Financial Analysis Journal 1984년 11/12월호에 실린 리뷰(The Rocky Road to Riches)와 일치하는데, 캔 필드가 쓴 Heart at Work는 역시 같은 책(GRYOW)을 인용하지만 SBS 방송에서 나온 것과 같습니다. 그 책 자체가 일관적이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거짓과 사기
그러다가 이 이름을 위키피디어에서 찾았더니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선 스롤리 블로트닉은 연구소 이름이 아니라 사람 이름입니다. 사실 방송에서 "스롤리의 블로토닉 연구소"라고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스롤리가 무슨 지명이나 학교 이름쯤 되나보다 했습니다.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더 놀라운 점은, 박사 학위를 사기 치고(심리학 전공을 한 적이 없었고, 가짜 학위를 찍어내는 곳에서 돈 주고 샀음), 라이센스 있는 심리학자가 아닌데 심리학자라고 사칭을 하고(뉴욕주에서 범죄 조사crime investigation를 받음), 10년 가까이 컬럼 연재를 했던 포브스(Forbes)에서 연재 중단을 당하고, 종합하면 "사기꾼" 취급을 받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기" 부분에 대해 좀 더 집중적으로 조사를 해봤습니다. 뉴욕 타임즈 기사,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 기사나 Fakes, Frauds & Other Malarkey나 Investment Illusions, Backlash: The Undeclared War Against American Women 같은 대중에 퍼진 가짜, 사기를 밝힌 책, 당시 스롤리의 사기를 찾아내고 연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 기자(Dan Collins)의 2006년도 회고 인터뷰, 블로트닉이 쓴 책에 대한 리뷰, 등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전모를 볼 수 있습니다.
그가 했던 연구 모두가 진위 여부를 두고 많은 의심을 받았습니다. 사실상 학계에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무시하는 눈치입니다.
그 정도 규모의 연구라면 엄청난 노력과 돈이 들었을 것이고, 그걸 개인이 진행할 수준이 못되며, 그런 규모라면 아는 사람이 분명 여럿 있을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상하며, 또 그 연구에 대해 출판된 기록이라면 오로지 스롤리 자신이 쓴 대중을 위한 자기 계발 서적 몇 권에 지나지 않는 것도 신뢰감이 들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또 스럴리 자신이 쓴 책에서도 말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인터뷰에서도 일관성 없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1960년부터(TCS에서는 1958년에 시작했다고 합니다) 20년 동안 추적조사를 했다고 하는데, 스롤리의 생년으로부터 미루어보면 그가 스무살도 되기 전부터 이 연구를 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 점도 의심을 받습니다 -- Behavior Today에 보면 그는 1958년 대학생(학부) 시절 프린스턴의 로버트 부시(Robert Bush 이 사람에 대한 정보는 찾지 못했습니다) 교수 밑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하긴 합니다.
스롤리의 "해명"에 따르면 자기가 사비를 털어서 거의 혼자서(자신의 말에 따르면 여가 시간을 희생하며) 직접 전화 걸어가며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9000명을 말이죠. 그것도 한 집에 전화걸면 그 집에 있는 가족 구성원 모두에 대해 질문하는 식으로 전화거는 숫자를 줄였다(800에서 900 가구)고도 하죠(그런데 이렇게 하면 bias가 들어갑니다). 그는 "난 내 연구가 과학적이라고 말한 적이 결코 없다"(I have never said my study is scientific)고 변명하기도 했습니다(위 Investment Illusions에서 재인용). 자신은 그냥 전체적인 그림을 보려고 했다는 것이죠.
많은 책들이 이 맛깔스러워 보이는 연구를 진위와 출처 확인 없이 인용하고 있고, 2008년 현재 방송에서도 그런 일이 벌이지고 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사실을 알게된 경우도 있습니다. Buying Trances라는 책의 저자 Joe Vitale 박사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책 서문에서).
In one of my latest books, The Attractor Factor, I recount the story of Srully Blotnick, an author and researcher of many bestselling books. Dr. Blotnick often wrote about a study done proving that people who follow their dreams make more money than those who pursue money. It’s a fascinating report. It’s inspiring. It’s one of the favorite sections in my own book.
But the story, I’m told now, is a myth.
Apparently Blotnick never did the research.
According to Susan Faludi, author of Backlash: The Undeclared War Against American Women, while Blotnick wrote several respected books, and they were all published by reputable publishers, and he even wrote a column for Forbes magazine for ten years, he was later found to be a fraud.
Now those who read about his work today but who don’t know the punch line are inspired to pursue their dreams, just like the people in his study.
요약 정리
이제까지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스롤리의 블로토닉 연구소는 없다. "스럴리 블로트닉"이라는 이름은 있고, 그런 사람이 살았었다. (그리고 그가 포브스에 연재를 할 당시 개인 컨설팅 및 연구 회사를 갖고 있다고 말했던 적은 있다)
- 그리고 그 사람은 가짜 학위로 논란을 일으켰다.
- 그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연구를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연구는 방법의 적합성, 나아가서는 존재 자체에 대한 진위 여부를 심각하게 의심받았다.
- 이 연구를 사실로 알고 인용을 하는 책과 인터넷 글들이 굉장히 많다. 또 그런 글과 책을 보고 다시 인용을 하는 사례도 많다. 그래서 출간되고 사실 여부에 큰 의심을 받은지 20년이 넘는 책의 정보가 아직까지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병 주고 약 주고 시대
TV 방송에서 잘못된 정보가 나갔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제대로 확인 안된 정보를 방송한 점이 유감스럽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실 이보다 더 큽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계속 복제 확대되기가 무척 쉬워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보가 여러 곳에 널려있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사실일거야"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영어로는 이런 진짜 같은 가짜 사실을 factoid라고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인터넷의 역기능과 순기능을 동시에 봅니다. 다음세대재단의 체인지온 컨퍼런스에서 저는 "병주고 약주고"라고 비유했죠. 왜 "약"이냐고요? 이번 연구에 대해 누군가(김창준)가 인터넷으로 이런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터넷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인터넷이 없었으면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도서관에 가서 이런 조사를 한다면 그 비용이 수십배 높아질 것이고 저는 그 비용 때문에 아예 조사를 포기할테니까요.
현대 사회를 사는 시민들은 정보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방법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정보 왜곡과 그 정보의 확산이 더 쉽고, 개개인의 판단이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런 조사를 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제 생각에, 통계 분석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 논문을 효과적으로 읽는 능력, 자료를 검색하는 능력, 비판적으로 읽고 사고하는 능력 등이 핵심적이리라 생각합니다.
난 그저 잘랐을 뿐이고
이번 사안은 설사 잘못된 정보가 퍼진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큰 비용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건강에 대한 정보 같은 경우에는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하키 선수가 중요한 시합 전날 손가락을 다칩니다. 경기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걱정을 하다가 인터넷에서 본 정보대로 손가락을 절단하고 경기를 뜁니다. 나중에 병원에 잘라낸 손가락을 가져가서 봉합 수술을 요청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감염 때문에 손 전체를 쓸 수 없게 됩니다. 아예 하키를 못하게 된 것이죠. 그레이즈 아나토미(Grey's Anatomy)라는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방송분의 제목이 "반창고로 총알 구멍 덮기"(Band-Aid Covers the Bullet Hole)입니다.
허구이기는 하지만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자신도 이런 정도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잘못된 정보로 손해를 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모 조사에 따르면 인터넷의 잘못된 지식검색 정보로 피해 경험을 본 사람이 16.7%라고 합니다. 기사에서는 낮은 수치로 해석하는데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또 피해 경험을 봤는데 스스로 모르는 경우도 많을 것이입니다. 실제로는(지식 검색뿐 아니라 인터넷 전반으로 보면) 훨씬 더 많으리라 짐작합니다.
난 그저 갈아먹었을 뿐이고
마지막으로 제가 얼마전 겪었던 일화를 말씀드리며 긴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제가 아는 친구들이랑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한 친구(학부에서 생물학 전공)가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습니다. 최근 들어서 새로운 나만의 파워 드링크를 개발하려고 노력해 왔는데, 만족스러운 것을 찾아내었다는 겁니다. 그걸 마시면 정신이 확 들고 힘이 난다나요.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데, 포도를 잘 씻어서(밀가루에 묻혀서 씻으면 농약을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답니다) 믹서기에 껍질, 씨앗 모두를 다 갈아서 마시는 겁니다. 저도 혹하더군요. 정말 그렇게 좋아? 느낌이 확 와?
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또 다른 친구(단백질생물정보학 연구실 석사 과정 중)가 입을 열었습니다. "사과 씨앗에 비소가 많아서 씨앗 먹으면 비소 중독 걸려. 포도 씨에도 비소가 있을지도 몰라." (이 글에 퍼키군이 댓글을 달았는데, 당시에는 비소/청산가리라고 이야기 했는데, 확인 결과 시안화수소라고 함)
애초에 이야기를 꺼낸 그 친구는 처음엔 웃었습니다. "에이, 농담하지?" 그런데 이 새롭고도 치명적인 정보를 준 친구는 평소에 농담을 잘 안하는 친구입니다. 굉장히 심각한 사실도 싱글벙글하면서 이야기 해주거든요.
갑자기 친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굉장히 당황해하더군요. 우리가 이 친구를 토닥이며 진정시켜주는 동안 비소 이야기를 꺼낸 친구는 구석 책상에서 뭔가 또각 거리더니 냉큼 달려왔습니다. 펍메드(Pubmed 가장 큰 의학 논문 데이터베이스 중 하나)를 검색했더니 포도씨에는 그런 위험성이 거의 없고, 몸에 좋은 성분도 꽤 있다는 연구 결과들을 말해줬습니다.
병주고 약주고 맞죠?
--김창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