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집은 TV 시청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만(TV 팔아버리자는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가끔 우연히 TV를 틀었는데 재미있고 유익한 방송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 11월 24일이 그랬습니다.


공부의 제왕

MBC에서 매주하는 공부의 제왕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더군요. 학생이 신청을 하고, 공부의 신들이 그 학생을 찾아가서 공부 비법을 알려주는 것이 중심입니다만, 공신 그룹에 속하지는 않지만 뛰어난 학생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비법을 듣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 부분은 김장훈이 진행을 했는데, 그날 만나러 가는 학생은 축구선수였는데 진로를 바꾸고서 전교 1등이 된 학생이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귀가 솔깃했습니다.
 
제가 훈련소에서 만났던 동기 중에 축구선수 출신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축구선수로 활동하다가 고등학생 때인가 허리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자기는 수업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어서 곱하기 나누기도 잘 안되는 수준이라고 하며 자기는 축구 말고는 정말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 하더군요. 그래서, 축구선수 출신에서 전교 1등이 되는 변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백승훈이라는 학생이었습니다. 중3 때 부상을 당해서 축구를 못하게 되었고 진로를 공부로 바꾸어야 했답니다. 중3 성적이 전교 꼴지였습니다. 고1 성적은 전교 1등입니다. 김장훈이 백승훈 학생 집에 가서 먼저 한 일이 공부방을 보여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그런데 따로 공부방이 없다고 합니다. 부엌이자 거실인 좁은 공간에 개다리 소반 놓고 공부한답니다. 독서실도 안가고 거기에 책상다리 하고 꼿꼿히 앉아서 공부를 한답니다. 이야 이건 시작부터 놀랍습니다.

정말 인상적인 것은 그 학생이 설명하는 자신의 공부 비결들입니다. 방송에서는 세 가지가 소개되었습니다(이것들 외에도 백승훈 학생이 자각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된 방법들이 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 스터디 노트

원래는 "마법의 노트"라고 소개되었습니다. 다음에 공부할 계획을 노트에 적어두었다가 날짜가 지나면서 계획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체크하는 노트를 말합니다. 평범하지요. 그런데 계획을 짜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초기에 자신이 스터디 노트를 쓰면서 실패했던 경우를 먼저 설명해 줬습니다.

초기 노트를 넘겨서 보여주는데, 몇 월 몇 일 이렇게 써있고 밑에는 영어 공부 한 시간, 수학 공부 얼마 이렇게 죽죽 써있습니다. 그 오른쪽에는 나중에 제대로 지켰는지 안지켰는지를 표시하고 있습니다만 제대로 지켰다고 표시한 것이 얼마 없습니다.

백승훈 학생이 말하는 초기 계획법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외부 조건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 그래서 갑작스런 일이 생긴다거나 하면 일정을 지키기 힘들다. 다른 하나는 계획이 구체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동기가 잘 생기지 않고, 제대로 공부 했는지 안했는지 판단도 모호해진다.

그래서 개선을 합니다. 다음 시기의 노트는 다른 방식으로 기록했습니다. 계획법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선 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습니다. 대신 공부를 하려고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에서 할 공부의 계획을 세웁니다. 저는 이것을 실시간(Just In Time, JIT) 계획법이라고 부릅니다. 어차피 계획이라는 것은 틀리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 오차를 줄이려고 계획 세우기와 실행의 시차를 줄이고, 실행 시간을 짧게 하는 겁니다.

거기에 더해, 계획 내용이 훨씬 더 구체적입니다. "수학 공부" 대신에 "어떤 문제집 몇 페이지 몇 번 문제부터 어디까지를 몇 분 동안 풀겠다" 식의 구체적 항목들이 나옵니다. 계획과 실행 사이의 간격이 짧아서 이 정도의 구체성이 가능하며, 또 계획을 지키기도 쉽습니다. 이러면 내가 하려던 것을 했는지 안했는지 판단도 명확해 지고, 공부할 때 뚜렷한 목적의식도 생기고 동기가 강화됩니다. 공부 후에 성취감도 크겠지요.

2. 약점 보완

방학기간에는 약점을 보완하는 데에 주력했다고 합니다. 우선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요. 그러고 나서는 문법이나 단어 등 자신의 약점을 해결하는 데에 방학을 적극 활용했다고 합니다.

사실 성적 올리기에 있어서 가장 수월한 것은 자기가 이미 잘하는 과목의 점수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못하는 과목의 점수를 올리는 것입니다. 90점에서 91점으로 올라가는 1점은 얻기가 무척 어렵지만, 10점에서 11점으로 올라가는 1점은 대단히 쉽습니다. 다만 해결해야 할 것은 심리적인 저항감을 극복하는 문제이지요.

3. 모의 훈련

축구선수라는 점이 이 방법을 고안하는 데에 분명 유리하게 작용했으리라 짐작합니다. 백승훈 학생은 공부할 때에 스톱워치를 애용한다고 합니다. 스톱워치를 사용해서, 자신에게 최대의 제약 중 하나로 작용하는 시험 시간을 훈련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수학 시험 시간이 전체 60분이고 전체 문제는 60문제라고 칩시다. 공부를 하는데 지금 남은 시간이 10분이라고 치면 전체 문제 대비 정해진 시간 동안 풀어야할 문제수(이 경우 10 문제)를 계산해서 스톱워치를 맞추고 문제를 풀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답을 찍는 것까지 정해진 시간 안에 해보는 훈련을 했다고 하네요.

보통, 모의 고사 문제를 학생이 혼자 풀어보는 경우에 자발적으로 시간 제약을 두는 경우는 있지만, 평상시에도 10분 단위로 제약을 걸고 그에 맞는 문제 숫자를 계산해서 푸는 훈련을 하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전이(Transfer)

인지심리학에서 쓰는 용어로 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체스 전문가가 바둑도 잘 둔다면 전이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쪽의 전문지식이 다른 쪽으로 넘어오는 걸 말합니다. 하지만, 전문성 연구에서는 일반적으로 전이(특히 관계가 적은 분야일수록 그러하며 이런 전이를 Far Transfer라고 합니다)가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학습 방법과 습관, 태도, 메타인지, 메타스킬 등은 전이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배움의 기술이라는 책이 작년 10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알라딘)


저자는 체스 세계 챔피언이었는데 나중에 또 다른 세계 챔피언이 됩니다. 태극권으로 말이죠. 굉장히 놀랍지 않습니까? 체스와 태극권은 우리 몸에서 완전히 다른 부분을 사용하는 분야라 서로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냥 잘하는 정도도 아니고 세계 챔피언이라니요. 저자는 이런 성공이 가능한 이유가 "배움의 기술" 때문이라고 합니다.

백승훈 학생은 분명 훌륭한 축구선수(혹은 적어도 능력을 스스로 개선해 나가는 선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때의 습관과 태도가 공부에도 적용되어서 그런 좋은 성과가 난 것이라 봅니다.

방송 중에 중3 때 전교 꼴찌한 성적표랑 고1 때 전교 1등한 성적표를 나란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학생의 개선 능력과 공부 능력은 이미 1등감이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덧붙여 저는 이런 개선 능력, 공부 능력은 훈련에 의해 얼마든지 신장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또한 "배움의 기술"의 저자 조시 웨이츠킨의 믿음이기도 합니다.


애자일 공부법?

이 블로그를 구독하시는 분들은 느끼셨겠지만 이 학생의 공부법이 애자일합니다. 실시간, 짧은 주기,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법이 그러하고, 방학 때 ROI가 높은 것을 찾아서 공부하는 우선순위 관리가 그러하고, 되도록 실제 상황을 자주 그리고 일찍 경험하는 모의 훈련도 그러합니다. 또 무엇보다도 스스로 개선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는 점이 그렇습니다. 꼴찌에서 1등이라니, 정말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TV 방송을 보면서 탄성을 몇 번 씩 질렀습니다.

--김창준

p.s. 방송을 보고 계발을 받아 우리 회사 업무에도 몇가지 적용했는데 만족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