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녹음할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했기 때문에 따로 수첩에 적을 생각도 안했고요. 같은 장소에 있었던 김승범군과 그날 밤, 다음 날 정도에 회고를 하면서 간단히 키워드를 적어둔 정도였죠. 그래서 아마 빠트린 것도 있을 겁니다만 큰 실수는 안했다고 생각합니다.

Q: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올 경우 같은 문제에 어떻게 재접근하는지? (개멍님)
문제가 잘 안풀리면 밖에 나가서 전기톱(chainsaw)질을 한다고 합니다(켄트 벡은 목장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땀을 흘리고 나면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저 역시 기천을 통해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현재 자신의 의식을 잡아맬 수 있는 다른 것에 집중하다 보면 새로운 사고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무의식이 작동한다는 이야기도 했고요. 의식을 잡아매는 데에는 육체적 활동만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술 활동도 좋은 방법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컴퓨터 영웅 중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꽤 있는데(예컨대, 앨런 케이는 실제로 재즈 아티스트이고, 도날드 크누스는 뛰어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이지요) 켄트 벡은 어떤지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기타와 벤조를 연주한다고 합니다. 대학에서 1년은 기타를 전공하고, 1년은 컴퓨터, 다시 기타 이런 식으로 번갈아 가며 공부했답니다.
Q: 삶과 일을 어떻게 균형 맞추는가? (종소리님)
켄트가 뭐라고 답을 했는데, 옆에서 신디가 "솔직해지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켄트가 '잘 못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한국의 평균적인 가장에 비해서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컨퍼런스를 아무 때나 모든 가족과 함께 다닐 수 있는 것은 홈스쿨링을 하기 때문입니다.
켄트는 거의 대부분의 일을 목장 안에 있는 자기 오피스 건물에서 한다고 합니다. 집에서 일하는 셈이죠. VNC와 스카이프 등을 이용해서 온라인으로 클라이언트를 만나고, 원격 짝 프로그래밍도 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자기 집을 찾아와서 같이 일할 때도 있고, 켄트가 직접 다른 곳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면대면으로 일하는 것이 훨씬 낫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이렇게 가택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일하면 인터럽트가 계속 걸리지 않느냐는 질문에 켄트 역시 그렇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 딸 아이가 옆에서 아빠 팔꿈치를 찌르며, "아빠, 아빠, 아빠"하고 불러대는데 그걸 무시하고 키보드만 또각 거릴 수는 없다는 거지요. 그러면서 질문을 던집니다. "뭐가 더 중요합니까?" "당연히 아이가 먼저입니다."
세째 딸(켄트는 아이가 다섯입니다)이 유아였을 때, 켄트는 컨설턴트로 무척 바빠서 심지어 하루에 18시간도 일했답니다. 그래서 그 아이와는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는데, 결국 다섯 아이 중에서 그 아이하고만 뭔가 관계가 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인터럽트가 자주 걸리는 상황을 개선하느냐는 질문에, 특별한 방법이 없고 그냥 서로(부모, 아이 모두) 노력할 뿐이랍니다. 애들이 조금 크면 아빠가 바빠보이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해서 적절한 시점에 인터럽트를 건다고 합니다.
Q: 지식 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 (zelet7, 학생님)
개인 위키 사용 안합니다. PIMS 안 씁니다. 한마디로 특별한 지식관리 도구가 없다고 합니다. 처음에 이 질문을 했을 때 켄트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더군요. 머리 속에 다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사용했던 코드 조각(code snippet) 같은 것은 어디에 저장해 두냐고 했더니, 모두 머리 속에 있다고 합니다. 켄트가 전에 코드의 재사용 대 지식의 재사용에 대해 이야기한 기억이 났습니다 -- 예를 들어 켄트는 Money 클래스를 라이브러리화 해서 갖고 다니지 않고 매번 새로 만듭니다.
그의 글을 인용하면,
... Although Money seems to be a perfect candidate for the Reuse Grail, it does not work out that way. Therefore, I carry around in my head a pattern language for creating Money and I reimplement it every time from scratch. ... --Kent Beck
어처구니 없어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중요한 아이디어가 숨어 있습니다(여기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켄트의 답변(제스쳐라고 해야하나)은 워드의 얘기를 연상케 하기도 했습니다.
I prefer my own memory to paper. It works hands-free while driving, works without light late at night, and it's waterproof in the shower. I especially like the way it improves everything I put into it. I have missed an occasional appointment. Perhaps that's an improvement too. --Ward Cunningham from Is Anything Better than Paper?
번역하면,
저는 종이보다 제 자신의 기억을 선호합니다. 운전할 때 손을 쓰지 않고도 가능하고, 밤 중에 불빛 없이도 사용할 수 있고, 샤워 속에서 방수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그 속에 넣어두면 모든 것이 나아지는 면을 저는 특히 좋아합니다. 때때로 약속을 까먹기도 했습니다. 그것 역시 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워드 커닝햄, "종이보다 나은 게 있나?"에서
하나 더 있습니다. 기억력 자체도 쓰다보면 개선됩니다. 다시 켄트와의 대화로 돌아와서...
중요한 정보를 어떻게 다 기억하냐고 물었습니다. 대부분은 기억하고, 그렇지 않으면 책을 들춰본답니다. 집에 약 만여권의 책이 있는데(세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모르겠답니다) 그걸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노트북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컴퓨터가 아닙니다. 스프링 달린 연습장입니다. 오래전부터 노트북에 아이디어를 써오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절대 되돌아 보지 않습니다. 집에 가면 이때까지 썼던 노트북을 모두 보관해 두었는데 뭔가 찾아본 적은 한번도 없다고 합니다. 아, 딱 한번 빼고요. XP가 처음 시작된 날을 찾아보려고 옛날 노트북을 들춰본 적이 있답니다.
아침에 프리 라이팅(free writing, 별 의도 없이 펜 나가는 대로 글을 쓰는 방식)도 하고,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노트에 적기도 한답니다.
텍스트를 많이 쓰냐, 그림도 그리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림을 많이 그린다고 합니다. 마인드맵도 좋아하고요(켄트는 시중에 소개된 모든 마인드맵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봤으나 결국은 종이와 펜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참고로 켄트는 여행 다닐 때 약 30가지 색깔의 색연필 세트를 들고 다닙니다. 그게 정말 최소한도랍니다. 집에는 백가지가 넘는 색깔의 색연필 세트가 있답니다. 마인드 맵을 그리거나 할 때 의도적으로라도 여러가지 색깔을 사용하다 보면 머리가 말랑말랑 해져서 전에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확률이 높아집니다.
저 역시도 여러가지 색깔을 썼을 때의 효과를 켄트와 함께 체험해 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색깔 외에도 다양한 자극을 이용하는데, 예를 들면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종이, 다양한 재질의 종이를 좋아합니다. 예전에 신문을 구독할 때에는 광고전단지를 활용했습니다. 뒷면이 비어있는 것도 있고 양면 인쇄더라도 여백이 군데군데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뭔가 생각을 하고 키우고 할 때에는 광고전단지가 참 좋더군요. 종이마다 재질이 약간씩 다르기 때문에 "촉감"이라는 감각이 다양한 사고를 하도록 자극을 주고, 특히 기억에도 도움을 줍니다. 게다가 뒷면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눈물의 부도 땡처리 등등)도 연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후배 하나는 제가 광고전단지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가끔씩 광고전단지 모은 걸 가져다 주곤 했습니다.
다시 찾지 않는데 왜 쓰고 또 왜 보관하느냐는 질문에, 켄트는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쓰는 행위 자체가 기억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했습니다. 아마 심리적인 효과가 클 것입니다. 켄트에게 있어 기록은, 보관을 목적으로 한다기보다 "사고의 도구"가 주된 목적인 셈이지요. 즉, 종이 위에서 생각을 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겁니다.
(2탄에 이어집니다)
--김창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