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컴퓨터 쪽에서 큰 영향을 줬던 책, 그 중에서도 특히 감성적인 면에서 자극을 줬던 책을 꼽는다면 그 목록의 앞부분에 자리할 책이 있습니다.

Programmers at Work라는 책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12권짜리 위인전 전집을 읽으면서 꿈과 포부를 만들게 됩니다. 컴퓨터 쪽에도 분명 위인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있긴 한데 그런 위인전 전집 같은 게 흔치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PaW가 그런 위인전 전집의 역할을 해줍니다. 부제가 Interviews With 19 Programmers Who Shaped the Computer Industry입니다. 컴퓨터 산업을 형성한 19명의 프로그래머와 인터뷰. 멋지지 않습니까? 위대한 프로그래머들이 일하는 과정, 습관, 심지어는 그들의 코드 일부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원서는 출간된지 20년이 다됐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추천을 합니다. 인공지능 분야에서 잘 알려져 있고 구글의 연구 감독(Director of Research)인 피터 노빅(Peter Norvig)이 몇 달 전에 아마존에 이 책의 서평을 썼는데 그 걸 소개하겠습니다.
Read this to understand programmers

I have to say, this is a great book, almost unique in its scope; I wish there were more books like this. There are many collections of short biographies of mathematicians, and a few of computer scientists, but that's not quite the same as programmers. If you want to know what programmers do, the best thing is to read their code, but failing that (or in addition to that) you need to read interviews like this. I wish someone would do another book like this covering programmers of the last 15 years, but this one has a very good selection of programmers from the early PC era, and the interviews are very well-done: they let the programmer speak, yet the interviewer keeps them on track.

I'm sure some people will object: "How can this be a great book; it's from Microsoft Press! It features Bill Gates on the cover! Four times larger than anyone else!" Perhaps it would be better if Gates' picture were smaller, but admit it -- how many of the other faces do you recognize? And the fact is, billg was an extremely influential programmer, and the interview with him is a good one. I liked it so much I was inspired to write a short fiction piece on the subject (search for "Y2K Saga").

But don't just take my word on this book: trust the "customers who bought this"; they're also buying heroes of the open source movement like Joel and ESR, as well as (to my mind) the two best author/consultants in the business, Demarco and Weinberg.

It may still take you ten years to become an expert programmer, but carefully reading this book should speed up your quest, or at least let you understand better the programmers around you.

당연히 별 다섯개입니다.

제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월간 마소의 연재 번역 기사를 통해서였습니다. 90년대 초로 기억하는데, 당시에는 이 연재 기사가 PaW를 번역한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매달 한 명 씩 마소에 소개되었는데 원래 책에 나온 전원의 인터뷰가 실리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93년도에 신어림 출판사에서 "천재프로그래머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창시자들"이라는 제하에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마소의 인터뷰를 보면서, 또 번역본을 보면서(당시에는 원서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습니다) 꿈을 키워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충격을 받습니다. 인터넷에서 유명한 프로그래머들이 PaW를 강추한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만해도 "역시 그렇지"하는 정도였는데 어쩌다가 "19명의 프로그래머"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몇 번 스쳐 지나갔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그렇게 많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번역서를 빼들고 사람 숫자를 세어보았습니다. 몇 번을 세어봐도 제 책에는 12명 밖에 없는 겁니다. 이 배반감, 이 허탈감, 이 상실감! 마치 어렸을 때부터 믿어왔던 도사님이 알고보니 반쪽짜리 가짜였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번역서에는 원래 19명인데 사정상(도대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12명만 번역해 싣는다는 말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원저자의 머리말에서 19명에 대한 언급부분을 교묘하게 고쳐놓았습니다. 예컨대 It would have been foolhardy for us to attempt to identify the twenty or so best programmers in the world.라는 문장은 "그러므로 세계의 베스트프로그래머 가운데서 12명을 선정하는 일은 무모한 일일 수도 있겠다"로 살짝 바뀌어 있고, 번역서에 실리지 않은 사람에 대한 언급들은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식으로 책이 출판되면 19명 전부 번역된 책을 원하는 사람이 있어도 판권 때문에 책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번역서에 빠진 사람들을 보니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사람들인데, 거기에 PFS: File의 제작자 존 페이지(John Page)가 있는 겁니다. PFS: File은 제가 "내가 생각하는 방식, 소프트웨어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해준 프로그램들"(Visicalc, dBase, WikiWiki, Wordstar, Adventure, MRT, Wizardry, Ultima 등이 포함됨) 중 하나로 꼽는 대단한 프로그램입니다. 그 프로그램은 현재까지 제 영감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존이 빠지다니요!!!

비지칼크(최초의 스프레드쉬트)는 킬러앱의 대명사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비지칼크를 쓰려고 컴퓨터를 사는 사람도 흔했습니다. 컴퓨터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소프트웨어이고, 수십년이 지나서까지 그 원형이 거의 보존되고 있는(엑셀 등에서) 소프트웨어입니다. 제가 비지칼크를 처음 접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고의 지평을 넓혔다고 할까요. 그런데 저는 비지칼크와 동급으로 PFS: File을 꼽습니다. PFS 시리즈에 대한 예찬은 노스모크 "프로그램예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김창준이 초등학교 3학년 때(83년도)인가 써봤던 오피스 소프트웨어 스위트입니다. PFS 파일, 그래프, 리포트 뭐 이런 시리즈인데, 그 개념이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HyperCard가 이 PFS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다고도 생각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였고, 사용하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어서 가물가물한데, 가장 인상 깊게 생각나는 것은 PFS 파일입니다. 하나의 데이타베이스를 새로 만들기를 하면 빈 화면이 뜹니다. 커서키를 여기 저기 움직이다가 적당한 곳에 "전화번호:"라고 쓰면 그게 필드 이름이 되고, 새 필드가 하나 생깁니다. 몇 줄 떨어져서 밑에 "성명:"이라고 쓰면 성명이라는 필드가 하나 생깁니다. 그러면 같은 화면에서 탭키를 통해 필드 사이를 오가며 정보를 써넣고 레코드를 추가, 수정, 검색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테이블에 필드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도 매우 쉽습니다. 당시 dBase 같은 RDBMS만 쓰다가 이런 pseudo-semi-structured DB를 써보니 마치 빈 연습장을 사용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위키를 처음 접했을 때 그 PFS 시리즈가 떠올랐습니다.
  • 소프트웨어 중엔 사용하는 사람의 인식을 전환/확장시키고 새로운 차원의 다양한 메타포를 생산해 내는 그런 것들이 있다. PFS 시리즈, 비지칼크(VisiCalc), 위키위키 같은 것들이다. --김창준
  • 원래 19명인데 번역판에는 12명, 즉 7명이 빠져 있는데 존 페이지는 소개했으니 나머지 6명은 누구일까요?

    1. 버틀러 램슨(Butler Lampson)
    2. 댄 브릭클린(Dan Bricklin)
    3. 밥 프랭크스톤(Bob Frankston)
    4. 피터 로이젠(Peter Roizen)
    5. 제론 레이너(Jaron Lainer)
    6. 마이클 홀리(Michael Hawley)
    대부분 낯익은 이름들이죠? 댄은 비지칼크의 아버지이죠. 언급했다시피 저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준 소프트웨어 중 하나입니다.

    원서는 절판되어서 새로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헌책을 구해야 합니다(저는 헌책을 다행히 구했습니다). 86년판이 있고 89년판이 있습니다. 내용상의 차이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류의 책이 몇 번 기획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전에 인사이트 출판사 사장님께 다음과 같은 제안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사장님, 공개해도 괜찮겠지요?)

    Programmers at Work라는 책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과거에 월간 마소에서 한달에 한 사람씩 번역기사를 냈습니다. 그게 모아져서 단행본으로 나오기도 했구요. 제가 그 책을 보면서 많은 자극과 계발을 얻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책이 우리나라에도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컴퓨터 계의 영웅들을 다룬 책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책에 실린 인물들은 "죽어"있습니다. 생존인물이 아니다 뭐 그런 말이 아니고, 너무 현실감이 없고 위인전 읽는 느낌이 든다 이거죠. 내 옆에서 팔딱팔딱 뛰는 생명력이 없다 뭐 그런 겁니다.

    반면에 "나는 프로그래머다" 혹은 "프로그래머 그들만의 이야기" 등의 자서전 류의 책은 또 꽤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책들은 할 말은 많은데 요령껏 잘 골라서 말하는 기술이 부족하거나 혹은 여러 사람에 공통되게 일관된 주제를 뽑아내거나 하는 유기적 연결이 부족합니다.

    인터뷰는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대화의 질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정말 재미없어 보이는 사람과 정말 재미있는 대화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인터뷰의 묘미이지요(이와 관련해서 사이토 다카시의 "질문의 힘"이라는 책을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저는 XXX씨가 이런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국내에 과거 유명했던 개발자들을 몇 명 선정해서 직접 인터뷰를 하고 책으로 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Programmers at Work 같은 책을 벤치마킹해서 말이죠. XXX씨도 이런 책을 한번 써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던 듯 합니다. 다만 시장성이 있냐 하는 대목에서 주저했던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시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예측은 참으로 어렵지만)


    국내에도 분명 역사에 남을만한 훌륭한 개발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없어서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책을 내는 작업은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PaW처럼 재미있고 또 가치있는 책이 되려면 쉽지는 않습니다. 대상 선정을 잘 해야하고, 재미있으면서도 중요한 질문을 해야하며, 인터뷰할 사람에 대한, 또 그 사람이 만든 프로그램에 대한 사전 연구가 되어 있어야 하고, 될 수 있으면 직접 만나서 장시간 이야기를 해야 하는 등 조건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책이 국내에도 꼭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느꼈던 뜨거운 가슴, 위대한 프로그래머에 대한 동경심을 다른 어린 친구들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창준

    p.s. 참고로 인사이트 출판사는 저와 인연이 깊습니다. 제 세 권의 책을 모두 여기에서 출판을 했습니다. 인사이트에는 어떤 사명감 같은 게 있습니다. 그냥 돈이 되는 책만 찍는다가 아니고 중요하고 필요한 책도 찍으려고 노력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몇 부 팔리지 않을 걸 예상하면서도 출판하는 책들이 있는 걸로 압니다. 이런 인사이트에서 한국의 PaW를 내줬으면 하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