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공무원들이 해외 연수를 가서 놀고 먹다가 오는 일이 대중매체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혈세를 낭비한다고 생각하게 되죠. 이 비슷한 일이 개발자 사회에서도 일어나곤 합니다. 회사에서 업무의 일환으로 해외 컨퍼런스에 보내주었는데 컨퍼런스 시간 중에 골프장에서 운동하거나 쇼핑몰에서 돈을 쓰거나 하는 경우를 직간접적으로 접합니다.

또 반대로 자기의 돈을 들여, 비행기 삯, 호텔비, 컨퍼런스 참가비 등을 내고 오는 사람은, 그렇게 겉으로 도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고 기분이 유쾌하지 못하죠. 특히나 돈벌이가 없는 사람(예컨대 대학생)이 자비로 수백만원을 들여서 간 행사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아마 컨퍼런스에 가서 세션을 듣지 않고 그 시간에 골프를 치는 사람은 그 쪽이 자신에게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컨퍼런스가 별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겠죠. (회사 입장에서는 그냥 자비로, 개인 휴가 써가며 교육 받거나 컨퍼런스 가려는 사람들을 찾아내어서 랜덤하게 휴가 지원해주거나 교육비, 비행기삯을 대주거나 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컨퍼런스나 비싼 교육이 생각보다 많은 가치가 있다, 질러 볼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제가 처음 해외 컨퍼런스에 참석한 것은 2003년도였습니다. 일본에서 열렸던 C5라는 컨퍼런스였고,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승범, 류상민군과 함께 갔었죠. 처음 시작은 김승범군이 자신의 영웅이었던 앨런 케이(Alan Kay)를 만나려는 프로젝트였는데, 저와 류상민군은 차를 얻어 탄 셈이었죠. 어떤 프로젝트든지 굴러가는 데에 에너지가 필요한데 김승범군은 당시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거든요. 일인당 1백만원이 넘는 돈을 썼습니다. 모두 자비를 들여서 갔습니다. 두 친구 다 학생 신분에 돈 쓰기가 쉽지 않을텐데 참 대단했죠.

C5 당시 감동의 하루하루를 보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날마다 밤에 세 사람이 숙소에 모여앉아 오늘 어떤 걸 배웠고 깨달았는지 공유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컨퍼런스의 에너지가 행사가 끝나고도 이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거의 반년을 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다녀온 후에도 자료를 찾아보고, "아 그 때 그 말이 이 뜻이었구나"하고 새삼 깨닫게 되는 부분도 있고, 나름 자신만의 응용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미주 쪽으로 간 첫 컨퍼런스는 OOPSLA 2005였습니다. 저는 400만원 가량 자비를 썼습니다. 가기 전에 컨퍼런스 신청을 할 때 "튜터리얼"(tutorial)이라는 것이 있더군요. 반일(3시간 남짓) 동안 소규모로 워크샵 등을 하는 것으로 컨퍼런스 참가 비용 외에 추가 비용을 받습니다. 하나 듣는 데에 50만원 정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두 개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주저했는데 그냥 질렀습니다.

그 둘 중 하나가 제프 패턴(Jeff Patton)의 UX와 애자일의 결합에 대한 튜터리얼이었습니다. 그 연결점에 대해서는 저는 그 이전부터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작정하고 공부하고 실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것 있죠? 장기적으로 중요한 일은 미루게 되는 경향. 그런데 그 3시간의 튜터리얼을 들으면서 거의 제가 6개월 동안 할 공부를 압축판으로 경험했습니다. 물론 그 정보들은 이미 제가 접했던 정보들이었습니다. 다만 나중에 읽고 공부해야지 하고 미뤄뒀던 것들이죠. 사실 그 컨퍼런스에 안갔더라면, 그 튜터리얼을 안들었더라면 제가 관련 공부를 차후에 언제 했을지 미지수입니다. OOPSLA에 다녀와서는 실제로 여러 정보를 읽고 공부하고 되새김질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제가 들인 50만원의 수십배가 넘는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정보가 없어서 공부 못한다는 말이 변명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공부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 의지력과 에너지가 부족해서 못하는 것입니다(시간이 부족하다는 것도 변명이고요). 그런데 이런 튜터리얼이나 컨퍼런스를 다녀오게 되면 약간의 타력을 이용해서 처음 몇 바퀴를 굴려서 의지력과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습니다. 발심을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통상 이런 의지력 충전의 파워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위 구루(guru)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강연을 들으면 저는 최소 반년은 고민을 하게 될 화두들과, 그걸 추구할 에너지, 뒷심, 발심이 생기더군요. 그 가치가 얼마나 클까요.

저는 결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이 컨퍼런스를 다녀오면, 이 교육을 들으면 결과적으로 의지력이 생기고 더 공부하게 될까. 또 그 결과 내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게 될까. 그림이 그려지면 지원합니다. 반대로 비용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거기서 쓰는 슬라이드 받아다가, 교재 받아다가, 책 몇 권 사다가, 남들 후기 읽어서 공부하면 비용을 절약할 수 있겠지? 그럼 굳이 돈 들일 필요 없겠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방법을 알고, 자료가 수중에 있어도 결국은 안합니다. 계속 미루게 되죠. (그렇지만 의지력이 대단한 분들이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상대적인) 비용 중심으로 생각하는 데에 매우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를 종종 실패하게 만드는 휴리스틱스(heuristics)입니다. 어떤 책이 있습니다. 다른 책들과 비교해 봅니다. 8만원? 너무 비싸네. 다른 책들은 2만원 대인데. 그러고 구입하지 않습니다. 우리 뇌에는 이런 비교를 빨리 해주는 회로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비용을 따지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얻을 효과를 따져보면 공식은 바뀌게 됩니다. 내가 8만원짜리 책을 사서 공부하게 되면 어떤 가치를 얻을 수 있을까. 그 가치랑 비용을 비교해보면 판단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비싼 옷을 삽니다. 그런데 실제로 몇 번 입는가 생각해 보면 "정말" 비싼 옷인 경우가 또 흔합니다. 여러분의 옷장 속에는 분명 비싼 옷인데(혹은 비싸기 때문에) 평소에 거의 안입는 옷들이 있을 겁니다. 내가 그 옷을 살 때 향후 어떤 가치를 얻을지를 별로 생각하지 않고 샀기 때문이죠.

저는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 이후로 책을 사는 데에 별로 주저하지를 않습니다. 이 책에서 얻는 아이디어 중 한 두 개가 내 평생 몇 만 원 이상의 가치는 충분히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상하게 이제까지 제가 살면서 나의 배움에 대해 "질러서" 후회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켄트 벡을 서울로 초청하는 일은 작년 10월부터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여러가지 사정으로 별로 진행이 되지 않던 중에 갑자기 켄트 벡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9월 1일에 한국에 올 수 있다. 이번 기회 아니면 당분간 한국에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한국에서 일주일간 있다가 갈 때에 이 정도의 금액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스케쥴로 보면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그런데 또 그만큼의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답을 못하고 며칠을 보냈죠.

고향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TV에서 무릎팍 도사라는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난타로 유명한 송승환이 나오더군요. 그는 자신의 최고 전성기 때에 부인과 함께 도미합니다. 거기서 가짜 시계를 파는 노점상이 됩니다. 정말 많은 고생을 한 듯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금 아니면 나중에 못할 것 같아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막이 흐릅니다.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안하고 사는 것은 내게 아무 의미 없는 삶이다." "내가 정말 불행할 때는 주머니에 돈이 없을 때가 아니라 머리 속에 다음 작품의 아이디어가 없을 때다." 그 프로그램을 보고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오자 마자 켄트 벡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와라. 내가 책임진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솔직히 있었습니다. 그 때 켄트 벡이 그러더군요. 무엇이 가능할까에 더 초점을 맞추자구요. 그의 이번 방한에서 목표로 하는 것 중 최우선 순위는 Wide impact on software developers in general(개발자 전반에 대한 폭넓은 영향을 주는 것)이고, 다음 순위는 Deep impact on the present and future leaders of software development in Korea(한국의 현재 그리고 미래의 소프트웨어 개발 리더들에 큰 영향을 주는 것)라고 하더군요.

켄트 벡으로부터 과거에 감동을 받은 분이라면 얼마를 쓰는가에 너무 주저하지 마시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에 집중하시면 지름신 강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